가자 압록강으로[충주-장호원]

2008. 2. 27. 11:29동서남북

10월 14일 놀토.

이른 일곱 시에, 충주시청 정원에 꽂아 두었던 깃발을 들고 출발한다. 임, 신, 이, 최, 유. 멀리 압록강을 그리면서 걷는다. 올 1월 마지막 날 새벽, 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에서 봄비 맞으며 시작한 걸음의 연속이다. 몇 구간씩 나누어서 틈틈이 이어오다가, 여름비가 내리던 6월 10일 오후에 충주에 도착했었다. 나머지,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 압록강변까지가 남았다. 우선 오늘 하루, 시작을 하자.


탄금대교. 지난해 1월말 만리포를 향해 갈 때, 안개 속에서 일출을 맞았던 곳이다. 오늘도 안개가 짙다. 속리산 천황봉 삼파수에서 발원한 달천이 남한강과 만나는 곳에 탄금대가 있다. 가야국이 망한 후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고 해서 탄금대(彈琴臺)란다. 숲이 있는 작은 산이 물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있고, 전설이 있고,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듬뿍 서려있다.


아득한 옛날, 엄청난 장마에 속리산 한 자락이 떠내려 왔단다. 그 때, 개 한 마리가 타고 와서 충주시내로 들어왔단다. 그래서 견문산(犬門山)이라고 불리던 것이 개 견(犬) 자에서 점 하나가 떨어져 나가 대문산(大門山)이 되었다고 한다. 북충주나들목을 나와 충주시내로 들어온는 길목에서 충주의 대문처럼 보인다는 말도 있으니 대문산이라는 이름도 그럴 듯하다.


이 지역은 합수머리에다 지대가 낮아 장마 때마다 물난리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충주댐이 완성되고 저 아래 조정지 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상습 수해지역이었다. 신라시대 지독한 장마가 지던 어느 날, 저 건너 김생사에서 도를 닦고 있던 명필 김생이 주술을 부려 반송산 한 자락을 날라다가 물을 막았다는 전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서 강물에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열두 번을 오르내렸다는 열두대가 있고, 일제강점기 때 민족시인 권태응 옹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다. 현대에 와서 세워진 야외음악당이 있고, 국궁 터가 있고, 충주문화원이 있다. ‥‥‥.


호수 그득한 가을철 물이 안개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다리를 건너 걸어가는 길에도 옛날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갈마마을에는 신립장군의 말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갈마음수형(渴馬飮水型) 명당도 있으며, 창동에는 마애불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저 건너에서 들려오는 우륵의 가야금소리를 감상했다는 청금정 자리가 있고, 루암리에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는 고분군이 있다. 흔히 중앙탑이라 불리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은 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국보6호로 지정되어 있고,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국보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망산과 그 밑 가신리에는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난을 피해 왔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곳곳에 효자각들도 있다. ‥‥‥.


이쯤 하자. 생활근거지인 탓으로 너절한 얘기가 끝이 없을 것 같다. 부질없는 집착인 것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집착이나 미련을 털어버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겠다. 가끔은, 터벅터벅 디뎌가는 발끝으로 속된 마음이 티끌과 함께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세상 어떤 일에도 노엽지 않을 것 같고, 뭐든 양보할 수 있을 것 같고, 한 없이 너그러울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일상으로 돌아와선 왜 그리 쉽게 다투고, 욕심을 부리게 되는지. 왜 그리 쉽게 마음이 탁해지는지. 지금, 걸어가는 머릿속에도 세상 잡일들이 머릿속을 들락거린다. 아, 더 걸어보자.


이내 안개는 걷히고 농부들은 가을걷이에 바쁘다. 한미FTA, 부진한 서민경제, 기득권 세력들의 기발한 계략 등 생존권과 관련된 어지러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 트랙터로 벼를 거두고, 콩 낟가리를 만들고, 수확한 곡식을 나르고 있는 이들의 진지한 얼굴을 본다. 투쟁이 필요할 땐 격렬하게 투쟁할 줄도 알고, 저항할 줄도 아는 이들. 지금, 자식을 기르듯 가꾸어 온 작물을 대하는 순간, 그 어떤 잡념도 푸념도 없이 진지한 저들의 얼굴을 본다.


노은고개를 넘어 막 내려가는데 길 옆 과수원에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혼자 사과를 따고 있는 청년이다. 사과 하나씩 먹고 가란다.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과수원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터에, 길 가는 나그네들을 불러 사과를 따 주는 청년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밝게 웃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맛있게 사과를 먹는다. 신선한 힘을 새롭게 받고 씩씩하게 걷는다.


솔고개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는 음성군이다. 월정리-상평리-주천리를 지나 감곡면소재지. 청미천 다리를 건너 경기도 땅으로 들어선다. 경상남도-경상북도-충청북도-경기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힘들어하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애초 여주군 가남면까지 가기로 했던 것을 장호원 터미널에서 멈춘다. 대략 36~7 Km.

 

"에헤야 가다 못가면, 에헤야 쉬었다 가지. 호박같이 둥근 세상 ‥‥‥."

(200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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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청(도보사랑 깃발/07:00)-탄금대교-가금면 창동-루암리(고분군)-중원고구려비-노은면 연하리(면소재지)-법동리-솔고개(중식)-음성군 감곡면 월정리-상평리-주천리(주천저수지)-오향리(감곡면소재지)-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