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 7. 11. 22:41강원




-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 모두 안녕.

어제, 2020년 7월 10일 공개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유서. 하루 전인 9일 실종, 자정 무렵 시신 발견, 10일 낮 유서 공개. 13일 발인 예정.

어리둥절. 모두에게 충격이다. 멍멍하고 어리둥절할 뿐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대학 1학년 때 유신 반대 시위로 제적, 투옥. 검사 1년만에 사표, 인권 변호사.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 신선한 아이디어로 시민 운동. 토건보다 시민 생활 향상에 치중한 3선 서울시장.

실종ㆍ사망 하루 전에 성추행 혐의로 피소. 고소인은 고인의 전직 비서. 고인의 사망으로 수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

와중에 가짜뉴스가 활개를 친다. 진영을 나누어 험한 말로 혐오감을 부추긴다. 귀를 기울여 들을 일이 있을까만,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목적으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과장하고, 선동하는 언행들에 마음이 언짢다. 사람이 참 잔인한 거 같아요. 2009년 노무현 전직 대통령 부음을 듣고 옆에서 누가 꺼냈던 말이 떠오른다. 물론 이번 일과 관련된 말은 아니다. 아, 인간의 참모습은 어떤 것인가.

爲世奉德當木覓
對衆仁政如漢水
潔身微塵猶突出
自叱棄命誰與酒

세상 위한 봉사의 덕은 남산과 같고
서민 위한 어진 행정은 한강과 같네
깨끗한 몸에 오히려 작은 티끌도 크게 솟아
스스로 꾸짖어 목숨 버리니 누구와 술을 나누리.
-정상일(2020.07.10)

엊저녁에 정상일이 조시를 보내왔다.

종일토록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대꾸를 하니, 다시 한 편.



별 하나 뜰 때, 나 보라고 떴겠니
억겁을 기다려야 간신히 피었으리
별 하나 질 때, 너 보라고 졌겠니
이쯤이 마땅하니 스스로 내렸으리
누구도 알 수 없는 캄캄한 하늘에
다시 또 떠오르네 가만가만 별들.
- 정상일(2020.07.10)

2020년 7월 11일 토요일. 아직 착잡한 마음을 밀치며 예정된 길을 나선다.

발교산 봉명폭포엔 기대와는 달리 물이 적어 아쉽다. 그런대로 바라보고, 둘러보고, 폭포 앞에 앉아 첩첩산중에 묻힌다. 시나브로 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산이 된다. 아! 그렇구나. 너와 내가 따로 없고, 산과 나, 숲과 내가 둘이 아니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가늘다고 아쉬워했는가. 아니, 저 얼마나 아름다운가. 두 줄기, 세 줄기 나뉘어 떨어지는 저 모습은 얼마나 의연한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바라본다. 저도 모르게 하나의 물줄기가 된다.

횡성호둘레길 5구간은 길이가 늘어나 있다. 먼젓번 걸었던 길이만큼 새로운 길이 나 있고, A코스 B코스로 구분되었다. 각각 4.5Km. 숲 그늘과 물, 물에 잠긴 산과 바람과 어우러지면서 구불거리는, 싫도록 좋은 길. 도보사랑 도반 다섯.

그간 쌓였던 속을 내보이고, 세상 얘기도 나누고, 웃고, 침묵하고. 그렇게 걷는다. 뒤풀이에서도 그렇게 웃고, 떠들고, 침묵도 한다. 조심스러워 함부로 내놓지 못하는 말이 그 속에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