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신바위[산청 정수산]
2021. 9. 23. 21:59ㆍ경상
어둠이 가시면서 새벽 빛이 번지는 하늘의 모습. 밤새도록 천지를 감싸고 있던 검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물감 번지듯 새는 빛이 그 자리를 채워 가고. 시나브로 저쪽 산등성이 위에선 붉은 해님이 삐죽 솟아 오르고. 기운찬 빛발이 쭉쭉 뻗치고. 만물이 몸을 털면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나그네는 길을 가고.
2021년 9월 23일 목요일. 새벽길을 나서다. 훤하게 밝은 이른 아침에 경상남도 산청에 있는 정수산에 오르다.
신등면 율현마을에서 굽이돌아 올라가는 길바닥에 입이 벌어진 채 떨어진 밤송이와 반들반들한 알밤이 널려 있다. 가을이 주는 풍요로운 풍경이고, 이곳 산천이 베푸는 넉넉함이려니.
숲속에 고즈넉이 깃들어 있는 대웅전을 비롯한 서너 채 절집. 천년 고찰 율곡사다. 잠깐 숨을 돌리고 물을 마시면서 율곡사 전설을 생각한다.
율곡사 대웅전을 고쳐 지을 때, 한 목수가 찾아와서, 일을 맡아 놓고 석 달이 지나도록 목침만 다듬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스님이 목침 하나를 몰래 숨겼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목수가 목침을 세기 시작한다. 한참을 세더니 갑자기 연장을 챙겨 떠나겠단다. 정성이 부족한 탓에 목침 하나를 덜 만들었고, 정성이 모자란 상태로는 큰절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님이 전후 사정을 털어놓으니, 목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다시 공사에 열중하였고, 아름다운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율곡사를 목침절이라고도 한다. 율곡사 대웅전은 보물 제374호.
큼직한 돌에 새겨 놓은 약도를 보면서 산길을 가늠해 보고 걸음을 뗀다. 작은 골짜기를 가파르게 올라선 산등성이 길 잠깐만에 새신바위가 나타난다. 생각했던 것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바위.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법당을 짓고 나서 단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목수는, 7일 동안 아무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호기심을 참지 못한 스님이 7일째 되는 날 문틈으로 법당 안을 훔쳐보았다. 안에서는 새 한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면서 단청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새는 단청을 완성하지 못하고 날아가 뒤편 산등성이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새가 들어간 곳에 글씨가 새겨진 바위 문이 있고, 이를 해독하면 문이 열리고, 단청할 때 사용하던 붓과 물감이 그 안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재주로 바위 문을 찾는단 말인가. 역시나, 아직까지 바위 문을 찾은 사람도, 글씨를 찾아 확인해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길은 계속해서 산등으로 이어진다. 작은 봉우리 두엇을 넘었나. 그 다음 봉우리에 정수산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표지석 앞 이정표에 정수산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걸음을 옮겨 본다. 그렇다. 정수산엔 표지석이 둘이다. 한쪽엔 841m, 다른 한쪽엔 829m.
되짚어 내려오다가 도성사 갈림길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내려와서 정취암을 찾는다.
대성산 정취암. 대성산은 둔철산의 다른 이름. 벼랑에 걸려 바위와 어울리는 절집이 절경이다. 관악산 연주대, 구례 사성암, 선운산 도솔암, 달마산 도솔암이 그렇듯이. 책바위 전설 등 절의 내력들을 적은 종이를 붙인 기왓장들을 죽 늘어놓은 것이 무슨 전시회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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