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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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밀림인가 비경인가[고창 운곡습지]
2021년 4월 13일 화요일. 고창고인돌박물관 주변에 널린 고인돌들을 둘러보면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다. 고개를 넘자마자 운곡습지를 만나다. 목재 데크로 된 탐방로를 걸으면서 놀라고, 놀라고, 또 놀라다. 원시 밀림인가, 저런 걸 비경이라고 하는가. 축축하게 물이 배고, 무논처럼 물이 고인 습지. 버드나무, 찔레 덩굴은 뚜렷한 숲을 이루었고, 일일이 이름을 헤아리기 어려운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마구 우거진 숲엔 이제 막 여린 연둣빛이 번진다. 연둣빛은 둠벙에도, 작은 못에서도 물감처럼 풀린다. 제멋대로 뻗은 나뭇가지도,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잎도, 둠벙도, 작은 연못도, 물이 밴 땅바닥도 모두 신비로운 기운을 풍긴다. 습지를 벗어나면서 이어지는 길은 운곡저수지 둘레길. 저수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2021.04.13 -
흔적[목포 유달산]
2021년 3월 4일 목요일. 이른 아침에 유달산에 오르다. 산수유, 매화, 생강나무가 여기에서 방긋 저기에서 방긋, 조용한 웃음으로 반긴다. 바람결이 풋풋하다. 봄기운이다. 오포대 앞세서 머뭇거리다가 둘레길로 들어선다. 채석 흔적. 일직선으로 점을 찍은 듯 작은 구멍들이 뚫린 바위 옆에 안내판이 있다. 바위에다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파고, 마른 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붓는다. 나무가 팽창하면서 바위가 갈라진다. 겨울철에는 그냥 물을 붓는다. 물이 얼어 팽창하는 힘에 돌이 쪼개진다. 고인돌이나 피라미드를 만들 때도 이런 방법을 썼다고 하며, 바위투성이 유달산에는 이런 흔적이 많다고 한다. 바로 옆 바위에는 그렇게 해서 돌이 떨어진 흔적이 역력하다. 다른 흔적들도 있다. 1982년 공원화 사업을 하기 ..
2021.03.04 -
과학과 전설[목포 갓바위둘레길]
2021년 3월 3일 수요일 오후. 달마고도에서 목포 갓바위 앞에 왔다. 갓바위 앞을 빙 돌아가는 도보다리가 놓였고, 뒤쪽 입암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입암산둘레길이다. 해가 좀 남았기에 한 바퀴 돌아본다. 다리 위 의자에 앉거나 서서 갓바위를 한참씩 바라보는 사람들. 나도 좀 섰다가 간다. 어쩌면 저리 흡사할까. 안내판에 과학이 있고, 전설이 있다. 과학에는 합리적 근거가 있고, 전설에는 민초들의 한과 염원이 서려 있다. 과학의 시대 사람들은 과학을 믿고, 전설의 시대 사람들은 전설을 믿는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과학: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서 풍화 작용과 해식 작용으로 생긴 풍화혈(tabon)이 삿갓을 쓴 사람 모습을 닮은 것. 전설 하나: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가난하게..
2021.03.03 -
달마산 허리둘레[해남 달마고도]
2021년 3월 3일 수요일. 땅끝마을에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해돋이 광경을 본다. 놀난 가슴을 다독이며 미황사로 간다. 신라 때 검은 소 한 마리가 땅끝에서 달마산으로 불상과 경전을 날랐다던가. 달마대사가 말년에 이 산으로 들어왔다던가. 달마산 허리둘레에 구불구불 길을 내고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 놓았다. 달마고도. 미황사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앞에서 달마고도에 들어선다. 산새들 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도저히 문자로 적어낼 수가 없는 저 소리. 조금 전 해돋이 광경에 이어 가슴을 흔드는 소리. 그러고 보니 이른 아침 산새 소리가 꽤 오랜만이다. 그것도 새봄이 열리는 때에. 벼르고 벼르던 달마고도에 이렇게 발을 들여놓는다. 길이 아주 훌륭하다. 잘 닦인 길에 한 길이 넘는 산죽 숲이 나타나고, 동백 숲..
2021.03.03 -
산천은 나의 교실[땅끝]
2021년 3월 2일 화요일 아침. 한 송이 두 송이 눈발이 날린다. 온 세상에 하얀 기운이 가득하다.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푸른 솔잎은 보석 떨기처럼 찬란하다. 잎 떨군 나뭇가지도, 마른 풀잎도, 산도, 들도 하얗고 하얗다. 어제 종일토록 내리던 봄비가 밤새 눈으로 바뀐 것이다. 봄을 여는 봄비요, 봄을 여는 서설이다. 새학년이 시작되는 오늘, 학교 대신 땅끝으로 간다. 퇴직 후 첫 출근이다. 땅끝에서 새 출발이다. 윤아는 오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집에서 천 리를 넘게 달려 해남군 땅끝마을에 왔다. 땅끝마을 못미처 송호리에서 김치찌개 점심상을 받고 새삼 놀란다. 전라도 음식이 처음이기라도 한 듯. 푸짐하고, 맛 좋고, 정겨운 밥상이다. 땅끝마을 주차장에서 바닷가로 길을 잡는다. 둘레길 열풍이 여기..
2021.03.02 -
그 길이 그 길[익산 무왕길]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을 가서 밤마다 무얼 가지고 서동의 방에 놀러간다. 향가 서동요의 내용은 대충 이런게 아닐까. 2021년 2월 20일 토요일. 무왕과 선화공주 전설의 고향, 익산 쌍릉. 소왕릉에서 대왕릉으로 간다. 200m쯤 떨어져 있는 두 능을 쌍릉, 익산 쌍릉이라고 한다.이번이 세번째인가. 친숙감이 든다. 자, 익산토성으로 가자. 어느쪽이지? 이정표도 없고, 사람들도 잘 모른다고 한다. 저쪽 길인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그쪽 길로 들어선다. 한적한 시골 마을 골목도 지나고, 논밭 사이로 이어지는 길. 가다 보니 전봇대에 매달린 화살표들이 보인다. 반가움과 안도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순례길이란 글자와 달팽이 그림으로 디자인한 이정표에는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 디..
2021.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