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143)
-
이 얼마만인가[오대산 비로봉]
2021년 1월 22일 금요일. 참으로 오랜만에 오대산 비로봉(1,563)에 오르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4월 말이나 5월 초쯤, 어느 주말. 직원 야유회라고, 관광버스를 타고 상원사 앞에서 내렸을 때. 버스에 싣고 온 막걸리통을 따라 숲속 물가로 주욱 몰려가 이렇게 저렇게, 삼삼오오 앉아 주거니 받거니 희희닥거리는 행사가 있었다. 그땐 그런 게 있었지. 한두 잔 어울리다가, 졸병에 속하는 서넛이서 슬며시 빠져나와 비로봉에 올랐었다. 무척 가파른 산길이었다. 물가 막걸리 자리에는 막 피어나는 나뭇잎들이 티없이 맑게 살랑거렸건만, 산꼭대기 비로봉에는 아주 두텁게 다져진 눈이 하얗게 깔려 있었고,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우리는 각자 주머니에 넣어 온 캔맥주 몇 통을 눈 속에 좀 깊숙이 파묻었다. 사방을 둘러보..
2021.01.22 -
피난민 마을을 보다[속초해변]
왜 걷는가. 이래서 걷는다. 세상 잡일을 잊고, 마음 비워지는 자리에 여유가 차오르고, 은근한 자신감이 솟는다. 까닭 모를 즐거움과 희망이 움튼다. 2021년 1월 16일 토요일. 바닷가를 걷는다. 속초시 외옹치항에서 영금정까지 왕복. 갈 때는 바닷가에 바싹 붙고, 올 때는 잠깐 동안 마을길을 뒤적인다. 12.03Km. 외옹치항에서부터 처음 얼마간은 길이 파도에 망가진 까닭에 우회. 군 경계 초소가 있어 최근에 개방되었고, '바다향기로'란 이름이 붙었고, 나무 데크로 낸 길. 짤막한 일부가 망가져 출입이 금지된 것이다. 고개를 넘는 왼쪽 길로 돌아 외옹치해수욕장에 와서 갈 수 있는 데까지 되짚고 나서 영금정을 향한다. 포근한 겨울 봄볕, 맑은 공기에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 검푸른 파도가 눈이 시리도록..
2021.01.16 -
길을 여러 번 물었고[춘천 봉화산]
이리 가면 구곡폭포 가는 길이 나오나요? 글쎄요. 이정표에는 저쪽으로 가는 걸로 되어 있던데요. 이 임도는요? 예, 저쪽에서 봉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요. 건성으로 들으면서, 자기들끼리 주고받는다. 아니야, (저 사람도) 몰라, 몰라. 그냥 가. 강선사에서 강선봉으로 올라선 다음, 검봉산(530)-감마봉-봉화산(526)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좋은 산등성이 길에서 내려와 문배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데, 두 사람 일행이 길을 묻는다. 봉화산 마루에서 사람을 만나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고, 꼼꼼이 이정표를 살폈기에 아는 만큼 대답했건만, 듣는 둥 마는 둥 가던 길로 계속 간다. 글쎄, 그쪽으로 가는 길도 있는가 보다. 가서 밥이나 먹자. 장가네 식당, 김가네 식당. 길에서 제일 가까운 '큰집'으로 들어선다. ..
2020.10.17 -
알밤을 줍다[홍천 봉화산]
알밤을 주워 먹는다. 올가을 처음으로 밤나무 밑에서 알밤을 주웠다. 이빨로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벗겨 퉤퉤 뱉어내고, 오도독거린다. 쩍쩍 벌어진 밤송이가 주렁주렁한 커다란 밤나무 아래 누런 밤송이가 널렸고, 사이사이에 빤질빤질한 알밤이 떨어져 있다. 성산터 마을. 강원도 홍천 봉화산 품에 안긴 산촌이다. 청정 마을이란 말이 붙어 있는 안내판이 아니라도 맑고 깨끗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걸 느낀다. 길가에서 무상한 세월을 지키는 밤나무에 내려앉은 가을빛도 티 하나 없이 맑고, 마을을 뒤덮은 숲 또한 천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낡은 빈집과 잡초 우거진 묵밭이 있고, 번듯하게 지은 새집이 있다. 꿈을 찾아 도회지로 떠난 자리이고, 번잡한 세상에서 자연의 품을 찾아와 깃을 튼 둥지이다. 코스모스, 맨드라미,..
2020.09.21 -
걸을 만한 길 험한 길[홍천 팔봉산]
걸을 만한 길과 험한 길 홍천 팔봉산. 산등성이에 오르면 맑디맑은 홍천강 물을 양옆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산. 해발 327.4m. 높지도 크지도 않지만 전국 100대 명산에 들었고, 홍천9경 중 으뜸가는 아름다운 경치로 꼽힌다. 2020년 9월 20일 토요일. 워낙 유명한 데다가 서울에서 가까운 탓인지 사람들이 많다. 더구나 휴일이다. 모두가 마스크 차림이고, 입구에선 연락처를 적고, 발열 체크를 한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사람들이 방역에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매표소에서 산등성이에 올라선 다음 몇 발짝 거리에 1봉이 솟아 있다.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 앞 이정표엔 '걸을 만한 길'과 '험한 길'로 방향이 나뉜다. 1봉을 거르고 가는 길은 걸은 만하고, 올랐다 가는 길은 험하고 위험..
2020.09.19 -
김유정문학촌[춘천 금병산]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소설 속 이야기는 현실 속 이야기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현실을 소재로 꾸민 이야기다. 산만한 현실 세계를 짜임새 있게 재구성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으로 세상의 모습을 반사하고, 독자들은 작품 속에 비친 세상을 읽으면서 삶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훌륭한 작가는 훌륭한 안목으로 세상의 모습을 파악하여 훌륭한 작품을 쓰고, 세상은 훌륭한 작가와 작품을 길이 기념한다. 2020년 9월 5일 토요일. 강원도 춘천시 금병산. 산 아래 실레 마을은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다. 작가의 고향에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기리는 문학촌이 들어섰고, 둘레길이 생겼다. 실레이야기길. 이야기길 일부는 20..
2020.09.05